약한 연결의 강한 힘

[황성진의 소셜이야기] 소셜의 인맥을 ‘소설’ 속 인맥으로 만들지 마라

광개토황 2014. 7. 8. 03:00

소셜의 인맥을 ‘소설’ 속 인맥으로 만들지 마라

 

자신이 누군가를 안다는 것이 하나의 자랑이 되던 때가 있었다. 유명인을 개인적으로 안다거나 그와 관련해서 남은 모르는 이야깃거리가 있으면 그것을 인생 최고의 자랑 거리인양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지금도 존재한다. 하지만, 소셜 네트워크로 인해 인간관계가 다변화 되고 있는 요즘... 그러한 자랑은 사람을 속물처럼 보이게 할 따름이다.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안다’는 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인가? ‘안다’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그노시스(Gnosis)’라는 ‘지식’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정보와 관계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시대에 있어 더 이상 단순히 ‘안다’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그리스어에는 단순한 ‘지식’을 의미하는 ‘그노시스’라는 말 외에 ‘정확하고 깊이 있는 지식’을 의미하는 ‘에피그노시스(Epignosis)’라는 말이 있다. ‘삶으로 승화된 지식’이라는 속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단어는 표면적인 지식 이상의 그 무엇을 요구한다. 마찬가지로 소셜의 관계적인 인맥도 ‘삶으로 승화된’ 그 무언가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속의 나와 연결된 ‘피상적 인맥’은 나와 ‘상호 간의 실질적 관계’가 존재 하지 않으면 ‘소설 속의 인물’일 수 밖에 없다. ‘내가 누구를 아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식의 생각은 이제 과거의 낡은 패턴이다. “야! 나 아는 사람 청와대에 있어.” 라고 말해도 이제는 “뭐 어쩌라고?”라는 대답을 듣기 일쑤이다. ‘내가 누구를 아느냐’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 나를 아느냐. 그가 나를 어떻게 아느냐.’ 이것이 훨씬 더 중요한 요소이다. 이 요소가 채워져야 비로소 앞서 언급 했던 ‘삶으로의 승화된’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아느냐’가 중요한 시대가 되면서 이제는 ‘소셜 브랜드’가 필요하다. 개인이 미디어가 되고 브랜드가 됐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각별하게 생각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에게도 내가 그렇게 소중할까?’의 문제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 있어 나는 수많은 ‘One of them’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아니, 필시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외사랑이고, 짝사랑이다. 혼자만의 자위이고 교감이란 찾아 볼 수 없는 독단적인 생각인 것이다. 그 사람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고 한 번 씩 전화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번호만 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한 마디로 말해, 그 사람은 ‘내 사람’이 아니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 하느냐’는 그래서 중요하다.

 

소셜의 인맥을 ‘소설’ 속 인맥으로 방치해서는 안된다.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거나 비중있게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나 역시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더 깊이 있고 ‘실질적인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인간 본연의 본질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이러한 노력의 장소를 ‘온프라인 (Onff-line)’이라고 표현한다. ‘온프라인 (Onff-line)’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